2005년 3월 29일 화요일

예수 이야기로부터의 생각의 끈.

늘 무시되는 사실이지만, 예수는 단 한번도 ‘원죄’ 따위는 얘기한 적이 없다. 그는 오로지 ‘회개’를 촉구했다. 예수가 말한 회개란 종교적 결신(교회에 나가고 계명을 지키는)이 아니라 ‘삶의 완전한 전복’을 뜻한다. 나밖에 모르던 사람이 남을 섬기며 살게 되며, 신분이나 세속적 조건으로 사람을 구분하던 사람이 모든 인간을 똑같은 형제자매로 여기게 된다. 그런 극적 변화가 회개이며 그로 인한 삶이 바로 구원이다. 그리고 그 구원을 통해 “양과 사자가 함께 뛰노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예수는 그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교회에 '안치'되어 있는 게 아니다. 하느님은 골방에도 시냇가에도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에도 슬픔과 비탄이 있는 어디에도 있다. 회개와 구원은 골방에서도 시냇가에서도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에서도 슬픔과 비탄이 있는 어디에서도 가능하다. 하느님을 볼모로 잡고 회개와 구원의 독점권을 주장하는 제도 교회는 오히려 회개와 구원이 어려워 보이는 유일한 공간이다.

- 김규항


'예수 이야기'처럼 블로그의 글들은 가끔 사고를 할 여유가 없는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던져준다. 짧은 시간동안 훑고 지나갈 뿐이긴 해도 어떤 경우엔 여운이 길게 남는다.

'늘 무시되는 사실'이지만 종교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상적 관계 형성을 가로막고 있다. 서로를 분리하고 심지어는 자신조차도 성속(聖俗)을 분리해 살게 한다. 애초의 종교적 가치가 삶의 안식과 정신적 풍요를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그 안식과 풍요가 자신의 영성의 샘에서 샘솟는다기 보다 상대의 가치와 비교우위를 점거하며 생긴다는 것일테다.

(이 글을 믿는다면)기독교에 '원죄'가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원죄'는 기독교의 사상을 구축하는 기본 골조였다는 걸 상기해 본다면 참으로 새로울 뿐이다. '원죄'를 풀기 위한 '회개'가 아니고 '죄를 사함'을 위한 '회개'가 아니라면 참 아름다운 '회개'일 법하다. 자신의 사상의 틀을 깨고, 삶의 틀을 깨고, 행동의 틀을 깰 수 있는 것이라면 진정 구원을 받을 수 있겠다 싶다.

기독교를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원불교 공부를 했던 사람으로서 종교를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여전히 비전문가지만) 종교에 대한 생각은 이미 새롭게 고쳐먹은지 오래기 때문이다. 다만, 위에 있는 글은 기독교, 비기독교를 떠나 내 삶 속에서 사유하고 사고하는 데 또 한단계의 계단을 준 것에 다름 아니다.

여전히 난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공간에 대해 (종교에 대해) 나름대로 확고한 결단을 가진 후로는 거부감이 있지만 그 거부감은 그 곳에서 안식과 평화와 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은 아니다. 종교가 권력이 되지 않고 낮은 곳에 임하기만을 바랄 뿐이고 성직자가 권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부처님을, 사은님을, 알라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분도 서로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지도 않으셨거만 세상의 모든 곳에서 함께 차마시고 대화하며 어깨를 걸고 술 한 잔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인데 그 분들 보이지 않으니 계시지 않으니 점점 잊어가는 지도 모르겠다.

자유와 생명가치에 반하는 권위와 권력은 재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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